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케하자마 전투 (문단 편집) == 배경 == [[스루가#s-1]]·토토우미를 지배하고 있던 [[이마가와 요시모토]](今川義元)는 근접한 [[오와리]]의 오다 가문과 [[오다 노부히데|노부히데]], [[오다 노부나가|노부나가]] 2대에 걸쳐 오랫동안 대립하고 있었다. 이마가와 가문은 사가미의 호조, 가이의 다케다 가문과도 분쟁 상태였기에 쉽게 오와리를 정복할 수 없었으나, 미카와의 마츠다이라 히로타다[* [[도쿠가와 이에야스]]의 아버지.]가 급사한 사건을 계기로 미카와에 대한 지배권까지 확보하였고, 처남 [[다케다 신겐]]의 제안으로 1554년에 호조, 다케다, 이마가와의 고소슨(甲相駿)[* 각각 세 가문의 본거지인 카이(甲斐), 사가미(相模), 스루가(駿河)의 글자를 딴 것이다. 정확히 말하면 각 지방의 별칭인 고슈(甲州), 소슈(相州), 슨슈(駿州)에서 나온 명칭.] 3국 동맹을 맺어 후방의 우려도 없애는 데 성공하였다. [[다케다 신겐]]과 [[우에스기 켄신]]이 시나노의 [[카와나카지마 전투|카와나카지마]]에서 길게 대치하게 되자 안심한 요시모토는 전군을 오와리로 파견할 수 있었고, 스루가의 방위는 아들 우지자네에게 맡기고 최소 2만 5천에서 최대 4만 5천이라는 대군으로 오와리 침공을 시작했다.[* 요시모토의 병력은 코요미키에는 2만, 무공야화에는 3만, 신장공기, 화본태합기 등에는 4만으로 기록되어 있는 등 다르기 때문에 자세히 상정하게 어렵다. 실제 고쿠다카의 한계를 고려해보면 2만 정도가 타당하지만, 4만을 동원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.][* 이 작전으로 이마가와 가문이 교토를 차지해 천하를 얻으려 했다고 해석되는 경우가 많으나, 확증은 없으며 오와리를 병합하기 위한 전쟁이었다는 것이 정설.] 에도 시대의 한 설화에서는 이 전투에 출격하기 전 요시모토와 후계자 다툼을 하고 져서 죽었던 서형 겐코 에탄이 꿈에 나타나서 '넌 내 원수지만 이마가와 가문을 위해서 얘기하는데, 이번 원정은 중지해야 한다'라고 호소했다고 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